아버지 사별 후 일주일,,

아버지 사별 후 일주일,,

편지다발 23 6,813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이 지나 다시금 회사에 출근을 했다.
바로 일주일전에 어떠했든가,, 아버지의 운명을 실감치 못하며 손님을 맞던 일주일전 월요일 점심시간,,
또 어제는 어떠했든가,, 일주일전 저녁때가 못 되었을때,, 그때만해도 아버지는 단 한가닥의 숨을
거북히 쉬면서 혹시나 누군가를 기다리지는 않았을런지,,
그렇게 빨리 눈감으실 줄을,, 그렇게 빨리 눈감으실 줄 알았다면 그 전의 시간들은
아마도 그렇게 흘려보내지는 않았겠지,,
얼마나 기가 막히는가,,, 아무도 아버지가 그날 저녁에 숨을 거두실 줄은 몰랐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동안 마지막 준비는 다 하셨을까,,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까,,

아버지 눈감기 이틀전인 금욜날 일주일만에 아버지를 뵌 내게 아버지는
'왔느냐'는 의미의 인사를 평소와 달리 '예뻐졌다.., 그동안 참 마니 예뻐졌다'라며 건네
남편과 나의 주의를 끌게 하셨다.
그게 아버지가 나를 맞이한 마지막 인사였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운명을 예측치 못했는데, 아버지는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셨을까,,
너무나도 복선이 깔린 드라마틱한 한 마디였던 것 같다.

아버지 가신 후의 일주일을 보내며 시간이 참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
시간이란, 우리가 통제하려 해도 통제되지 않고 물 흐르듯 바늘은 돌고 또 돌지만
그것이 인간의 생과 사를 지나치는 동안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하지 않고를
명확하게 밟아 간다는 사실이 시간을 거느릴 수 없는 사람으로서 무서웠다.
우리들은 과거의 행동과 상황들을 추억하며, 원한다면 다시금 시도해 봄직도 한데
인간의 생과사에 있어서는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기에
너무나 애틋하다.

지난 일요일 저녁
눈감으신 일요일 저녁 장례식장에서 몇가지 급한 수속을 밟고,
미쳐 챙겨오지 못한 짐을 가지러 다시 친정에 들렀었을때,
며칠전까지도 주인의 발을 싣던, 한동안 쉬고 있었던 아버지의 신발이
얌전하게 나란히 현관 한쪽에 놓여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려지기 시작한다.
아직은 많이 신어도 충분히 좋을, 아직은 다니실데도 많은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묵묵히 대기중인 아버지의 신발.
흐느끼며 안방에 들어섰을때, 나는 엎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두어시간 전만에도 아버지는 바로 이 침대에 누워서 거북한 숨이라도 연장하며
움직임이 유일한 눈만을 깜빡이시며 뒤치락뒤치락~ 대소변을 가리시며
눈 감으시기 전까지 정신은 살아 있지 않았던가.
그런 아버지가 지금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바로 전까지도 뒤척거린 아버지의 흔적이
이렇게 살아 있는데,,,배게에 떨어진 아버지의 머리카락,
심지어 이불위에 떨어진 아버지의 부스러기 각질들만이 떠나가신 아버지의 일부가 되어
아버지의 임종하시는것을 뵙지 못한 나의 얼굴을 부비도록 했다.
벽에 걸린 가장 최근 걸치시던 아버지의 겨울잠바, 아버지의 솜바지, 남방,,
하나도 명품이지 않은, 하나도 이쁠 것도 없는,,그러나 소중한,,,
가시기 전 아버지를 쓸쓸히 따뜻하게 했던 옷들을 만지니
그것들이 말없는 아버지의 유일한 분신들인 듯 하다. 거기서 그렇게 흐느끼고야 말았다
가시기 전날인 토요일. 아버지는 옆에 놓인 작은 수건으로 물을 추겨 얼굴을 닦아 달라 했다.
그렇게 얼굴을 닦아드리고, 다음날 고모님이 오셔서 그 수건으로 아버지의 진땀을 닦아 드렸다 한다.
작은 물수건은 아직 축축하다.
헌데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지셨다. 기막힐 노릇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눈을 감으셔서 화요일 발인을 하루 앞둔 짧은 3일. 월요일에 대부분인 장례는 치러질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생각보다 많은 손님이 하나 두울, 나중엔 그룹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간 내가 인사도 가지 못한 곳에서까지 분들이 오셔서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니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연세가 이른 나이에 운명하셔서 호상이라 할 수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대부분 음식을 들며
오랜시간동안 빈소에 머물다 가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셨을까.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화요일
생전에 엄마는 아버지한테 화장을 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반대는 없으셨지만 흔쾌히 수긍을 하신 것도 아니라 한다.
장지에 버스가 도착하고, 아버지의 관은 대기실로 향해 30여분간 대기를 했다.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아 오전 10시 30분이면 접수가 끝난다고 했다.
대기실에 모였던 사람들은 잠시후 다들 화장터 밖으로 나가 기다렸고
아버지의 관이 이동할때까지 나는 줄곧 아버지와 같이 있었다.
오랜 지병과 고통, 빛나지 못한 인생, 일찍 세상을 떠나 아쉬운 아버지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여기서 누리지 못했던 거 평생을 누리시기를,,
그렇게 마음으로 아버지를 달래며 흐느끼는데, 오래전 자신의 엄마를 보낸 기창이가
다가와 손을 꼭 잡아준다.
그리고 잠시 후 술에 취한 큰아버지가 조용히 오셔서 슬픔을 같이 하셨다.
큰아버지는 작년 가을 아버지가 병상에 들어 가신 후 도통 병문안을 오시지 않으셨다.
어느날 아버지는 엄마한테 '형은 왜 나를 보러 안 오지?'라 하셨다 한다.
형을 내심 기다려온 아버지가 누님이신 고모님이 오시자 이윽고 눈을 감으신 건 아닐까.
고모님이 만일 그날 오시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을까?
아직도 살아 계셨던 건 아닐까.
화장터를 향한 아버지의 차례가 오자 아버지의 관은 화장터로 옮겨간다.
어차피 막지 못할 관이 화장터로 들어가는 것을 필사를 다해 따라가다
관은 화장터로, 유가족은 관이 들어간 화장터를 호명하는 넘버를 향해 어느새 가서
관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유리창 사이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는 것,,,,,,참으로 할 짓이 아닌 듯 했다.
평소 내성적이시라 마음속을 표현하기 어려워 하시던 큰아버지가
그 광경을 지켜보시다 이내 울부짓는다.
'병례(아버지의 본명이 아니다. 어른들은 아버지의 애칭을 쓰곤 하셨다)야,,,,미안하다,,,,!! 흙흙,,,
병례야,,,,미안해,,,!!!!!'
동생을 먼저 보내는 형의 마음이야 오죽하실까,,,
화장을 하든, 장묘를 하든 돌아가신 분을 산 사람이 정리해가는 과정은 그만큼이나 힘이 든다.

수요일
많지도 않은 식구,,,말은 그렇게 안 해도 아버지가 없이 쓸쓸할 엄마 곁엔 다행히도
외가쪽 고모할머니가 며칠을 지내시기로 했다.
어제는 저녁 늦게까지 이모들과 수다가 많아 너무 재미있는 작은 할머님이 집에서
화투도 치시고, 수다도 늘어 놓으시며 안 그러면 쓸쓸할 집의 분위기를 돋우셨다.
결혼을 한 후 한 번도 친정에서는 잔 적이 없고, 이상하게도 안 자게 되던 나는
어제도 역시 친정서 잠을 자지 않고, 다음날 오후에 다시 친정에 왔다.
내일이 삼오제니까 저녁에 제기를 사러 가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터진 일이라 그날 저녁에 다 장만해야 하므로 마음이 서둘러지기 시작했다.
전날 저녁에 조의금을 같이 정리하면서 엄마는 남편과 내 앞으로 온 조의금들은
우리가 가져가는 것이 경우에 맞는 것이라며 결국 다 갚아야 할 것들이라 했다.
거기서 반정도를 자식으로서 아버지 조의금으로 드렸다.
원래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아버지한테 마지막으로 드렸던 용돈이 너무 약소해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마 평생 미안할 것 같다.
엄마는 우리가 드린 조의금의 일부로 제기와, 병풍, 돋자리 등등을 사셨다.

목요일
이틀만에 다시 찾아간 부평 소재 납골당.
다시 가도 느끼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엄마는 아버지의 분골을 할아버지 할머니 계신 김포 묘 옆에 묻으실 생각이었다.
헌데 큰댁 어르신들은 그곳 묘중에 작은 할머니 묘를 곧 이장하기도 할 것이거니와
왜 흔적을 없애냐고,, 이왕이면 납골당에 모셔 때되면 찾아가기도 하고 그래야 하지 않느냐고
납골당을 권하셨다. 말씀을 들으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 싶어 가족과 상의를 한 후
납골당에 두기로 한 것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건 영 아니었다.
가족묘(그것 역시 땅을 파해쳐보면 납골함만 덩하니 들어가 마찬가지라 한다)는 잘 몰라도
일반 납골당은 사물함처럼 다닥다닥 종이에 사인펜으로 써진 이름과 사진 조각 하나만 떡하니
부쳐져 있을 뿐, 꽃도, 애장품도 부착은 금물이며, 꽃은 복도마다 비치된 헌화함에 꽂으라 한다.
돌아가신 분께 애정 쏟아 부으면 뭐하냐 싶지만, 그래도 거긴 너무 삭막했다.
시맨트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차가운 납골 아파트와 같은,,
공간적으로 봤을때, 인류를 생각할때 참으로 실속있는 장묘문화이지만
그러느니 차라리 아버지 생전 좋아하시던 우리집 뒷동산에 묻어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더라.
인간은 본디 흙으로 돌아간다 했는데, 살아 생전 페질환으로 숨쉬기도 곤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라도 공기 좋은 곳에서 계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금요일
이날은 몇가지 서류를 처리하러 같이 다녀야 하는 날이라 했다.
먼저 의료보험공단에 갔다.
아버지 사망진단서를 들이밀자 잠시후 새 의료보험카드를 맹글어 준다.
새 보험카드엔 아버지의 이름이 없다. 가슴이 시려웠다.
보험공단에선 장제비 명목으로 25만원을 준다 한다.
아버지를 잃고 25만원을 받는다 생각하니 아버지를 그렇게 보낸 심정이 착찹하다.
동네 부동산으로 벌이가 거의 없었던 아버지는 5년전 즈음 상조보험을 들으셨나 보다.
엄마의 통장에서 자동이체로 빠져나가게 신청을 해서 그간 빠지지 않고 보험을 들어왔다.
장례비를 토탈 계산해보니 빈소대여비,염,수의복,상복대여,음식값,영구차대여,화장터비용 등등
이것저것 다해서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드는데, 보혐료는 그와 비슷하게 지급되는 듯 하다.
아버지는 또 9년 남짓 교통상해보험을 들어왔다.
운전도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왜 그 보험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 역시 부은 금액은
지급되는 듯 하다.
식구들 벌이 없이 평소 알뜰하기로는 저리가라하는 엄마는 무슨 돈이 있어 그러는지
아버지앞으로 들어온 조의금과, 아버지께 부조를 한 나머지의 우리 조의금을 합해
천만원짜리 통장을 내 명의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 돈을 1년간 묶어 두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에 친정을 갔다. 저녁엔 장볼 것이 있어 남편과 만나 이마트를 가기로 하고
그 사이 친정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초상때도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손님을 맞는데 정신이 없었던 엄마가
생각외로 씩씩하다고 사람들은 의아해 하곤 할만큼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는
두분이 동갑이신데다가 생활력 없던 아버지를 많이도 야속해 하던 엄마로서
더욱이 그런 행동은 나오지 않았었는데,
막상 하루하루 보내고 보니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엄마는 당신도 모르게 쓸쓸해하고 있었다.
무얼 할라 치면 깜빡거리고, 딸래미가 오면 필요이상으로 신경쓰시던 것도
그러기 귀찮은 듯, 앓는 소리 한 번 없던 엄마는 당신도 몰래 심히 지쳐있는 듯 했다.
집을 나올때  한 번도 배웅을 마다한 적이 없던 엄마는
결국 그날 잠이 들어 있었다.

일요일
화욜날 장지를 갔다가 오후에 친정에 들어와 아버지 눈감으시기 전 흔적들을
정리하면서 안방 책상 위에 널부러진 아버지의 유품들을 만지니 그 묻은 손때가 더없이
쓸쓸하고 정이 묻은 것들이었다.
작은 수첩 두개,,,하나는 회색의 일수수첩 같은 거, 또 하나는 초록색의 작은 수첩,,
둘다 지인들 전화번호와 병원에 계실때 메모해 둔 처방약 복용에 관한 기록들이다.
살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였지만, 기록하는 걸 좋아하셨고,
신문 스크랩도 종종 해두셨다가 나한테 필요한 정보 같은 것을 주시곤 했었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의 지병을 위해 모아둔 신문기사나 병원에서 준 심폐운동요법 화일이
눈길을 끌었다. 난 한번도 아버지의 지병을 생각하며 아버지께 그런 정보를 드린 적이 없었다.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는 당신의 지병을 스스로 챙겨가며 스크랩했던 아버지는 그것을 하면서
얼마나 외로왔을까.
작은 수첩 두 개중 하나의 맨 첫장을 열면
거기에 나와 남편의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더라고 남편은 내게 전했다.

유품들을 보다가 그리움이 사무쳐 옛날 사진첩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집 사진첩은 진짜 오래된 것인데, 그게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오빠 어려서 장만해 접착한 것들이다.
그것을 열면 내가 4살땐가 낙서해 놓은 사람 형상의 어린애가 그려놓은 낙서가 있다.
이젠 너무 낡아서 그야말로 너덜너덜,,,그안에 사진들 역시 죄다 빛바래 너덜하고 빛바랜 사진첩 껍데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너무 낡아 버리기 아까운 사진첩이 되 버렸다.
일욜엔 앨범을 하나 장만해 그 낡아바진 사진첩을 남편과 함께 갈아 끼웠다.
좀 특이한 것은 우리 가족이 대부분 찍혔어야 할 사진들이 아닌, 거기엔 아버지 엄마의 젊으셨던 시절,
특히나 아버지의 학창시절이나 군대시절이 70%는 차지할 정도로 아버지 사진이 많았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자란 아버지의 반항기 어린 고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멋내고 폼잡고 친구들과
찍은 많은 사진들이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인생을 생각하게 하니, 영화 '마지막 황제'가 떠올랐다.
고생없던 화려한 그야말로 피끓는 젊은 시절에서, 단란한 신혼과 가정을 꾸리시던 30대,
가족을 위해 살길을 찾고자 방황하고 힘들던 40~50대, 지병과 황혼으로 한없이 여려지던 60대,,
좀 더 오래 사셔서 다시금 피끓는 젊음으로 돌아가진 못한다 해도, 금빛세월 보내시며 엄마와 손주들과
넉넉하고 값진 황혼을 보낸다면 그나마도 행복한 인생으로 마감할 수 있었던 아버지 인생인데
내가 자식으로서 그 유종의 미를 못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
사진 중엔 신기하게도 73년에 찍은 인물들이 눈에 띈다.
테니스 라켓을 든 아버지도 있고, 나란히 선 분들은 아마도 그때 당시 직장동료들인 것 같은데
그분들의 옷차림을 보면 지금 입어도 손색이 전혀 없을
후드티에, 카메라가방, 가디건, 꽃무늬 원피스, 모자, 타이트한 기지 바지 등등
아무리 유행이 돌고돈다지만 신기하고 놀라웠던 사진이었다.
그렇게 진보적인 유행을 겪은 아버지가 한때 분식가게에서 튀김옷을 입히면서 아버지의 속은 과연 어땠을까.
이런저런 사진들을 남편과 같이 감상하며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감탄하면서
아버지 누우시기 전에 같이 보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후회했고,
사진첩이 낡아지던 근 20년간 아버지는 사진첩을 더이상 보시지 않고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Comments

편지다발
습기가 찬다,,,,표현이 독특하군요,,샤닝님,, 
편지다발
거리형아는 어떨때 보믄 인생을 다 산 사람 가틀때가 있어요,,,^^ 
거리
한달보름...,
힘이들겠죠..., 가신분은 정때려, 남으신분은 추억꺼내기에..., 아파도 오겠죠...,
아파오거나 슬플땐 우세요..., 신랑 붙잡고..., 다 받아 줄껌미다...^^

암튼 기운내시고 화이팅합니다..., 
샤이닝
중간 중간 습기가 차네요.....힘내십시오. 
편지다발
네,,그래야지요,,고맙슴미다,,^^ 
김애라
제가 일하는 직장상사도...설날 바로 직전 갑자기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옆에서 어찌나 안타깝던지...지병으로 돌아가신것도 아니고 갑자기...ㅡ,.ㅜ
나중에 출근해서 어떻게 버텨낼런지 걱정이 되었었는데...
물론 회사 사람들에게 표현을 가급적 안하려고 애쓰는거겠지만
우려했던것보다는 잘 견뎌 내더라구요~
옆에서 위로해줄 자기 남편과 자식이 있어 덜 힘들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더 힘들어할 어머니가 있기에...
힘내세요~^^ 
편지다발
보니까 토맥분 중에 부모님을 여의신 분들이 많쿤요,,,
헌데도 열심히 밝게 사시는 거 같아 한편 달리 보아 지네요,,^^
어쨌거나 자식들이라도 잘 살아가는 게 그분들의 바램이겠죠,,
다들 힘냅시다,,!! 
찰리신^.^~
제 어머님도 12년전에 돌아가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말한마디도 못하고...살아계셨을때
잘해드리지 못한게 마음에 후회만됩니다.고생만하시다가... 
편지다발
네,,살아 계신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해드리세요,,^^ 
초롱소녀
힘내세요...
저두 나중에 후회말구 부모님한테 잘해드려야 겠어요...^^ 
:+)곤(+:
비록 저의 부모님은 살아 게시지만..잘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랑은 멀리 떨어져 있어 언제나 맘 한쪽에는 허전한 마음만 있을뿐...

편지님의 글을 읽고나서 맘이 왠지모르게~ 흑흑..... 
★쑤바™★
떠나간 사람은...차라리..행복하리라...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과 추억들로 인해서...
가슴 쥐어뜯고 울부짖는건..결국 남은자의 몫... 
OOO
저의 어머님께선 당뇨합병증으로 8년을 넘게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죠
돌아가시기전까지 몇 번의 고비가 있었기에 막상 돌아가신 날엔 눈물도 아나더군요
그 때 누군가 그러더군요 이젠 어머님이 고통이 없는곳에서 행복하실거라고....

분명 편지다발님의 아버님께서도 좋은 곳으로 가셨을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그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죠
그 때 까지 열심히 사는겁니다
힘내십시요.... 
사다드
제마음도 아파요....기운차리세요...
저도 언젠가는 격게 될 일이네요...언제나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는데...막상 격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다발
엘카님의 말 뭔지 알거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제 외가쪽 사촌 기창이네를 보면, 왜 기창이가 그토록 무뎌졌는지
이해가 갈듯도 함미다,,
기창이네는 8년전 엄마와 사별하고,
지금은 아버지 식물인간 되신지도 3년이 넘었으니까요,,
부모님이 다 그리 되셨으니 혼기가 다 찬 막내 그녀석이 참으로 착한데
표정도 좀 어둡고 너무 안됐지 멈미까,,어여 좋을때가 와야 하는데,,, 
Molra^^
아프네..ㅠㅠ 
elcaa
저겨... 이런말 하기는 좀 모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별거? 아닌듯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별거란 말의 뜻은 여러가지가 있는데여.. 제가 말하고픈건 '일상생활'의 한 단편으로 받아들여진단거져.
결국 시간이 약임미다. -_-
저도 부친이 돌아가신지 20년 다되가지만 첨과는 다르게 아버지의 말에 흥분하지도 보고파하지도.. 그냥 그런 일이있었다는 것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낸다는 것에 놀라기도 함미다.
사는게 그런거지여. 언젠가는 혼자서. 가족도 꾸며야 할테고. 언젠가는 이별할 사람들이라면..  이별에 관대했음 함미다.... 
편지다발
써노코 보니 저만 유별난 것 같아 민망하군요,,
오늘 안부를 묻는 회사분들 덕에 한결 좋아진 것 같슴미다,,
열심히 살아야지요,,,, 
자이
맘이..ㅠ..ㅠ
....
힘내세욤...^^;; 
명랑!
눈물나오.emoticon_008 
KENWOOD
네,,,가슴아픈일,,,잘이겨내셧네요,,,
다발님의 해맑은 미소,,,다시 볼,,,그날,,,기다리겠습니다,,,^^;; 
편지다발
고맙슴미다,,,그래야 되겠지요,,^^
산 사람이야 어떻게든 산다고 하지 않슴미까,,, 
KENWOOD
편지다발님,,,힘드시겠지만,,,,
다시,,,평온의 일상생활로,,,한발자욱씩,,,내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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